[정진우 교수] 미움받을 용기(5: 마지막회):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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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SLD 작성일21-01-22 20:31 조회7,307회 댓글2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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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받을 용기(5: 마지막회):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아가라!
지난 시간 우리는 인간관계의 궁극적인 목적이 '공동체 감각'에 있다는 것을 배웠다. 공동체 감각이란 타인을 경쟁자가 아니라 친구로 여기고, 그들에게 인정받기를 바라기보다 그들에게 공헌하기를 바라며, 그 공헌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는 평화로운 삶의 방식이다. 지금까지 다루었던 "과제의 분리"를 통해 "공동체 감각"으로 나아가는 것, 이것이 <미움받을 용기>의 전체적인 핵심이다. 오늘은 그 목적과 핵심에 이르는 세 가지 방법을 다룬다.
아들러는 이러한 삶의 변화를 "나에 대한 집착"에서 "타인에 대한 관심"으로의 전환이라고 말한다. 공동체 감각에 이르기 위해서는 더 이상 오로지 자신이 인정받기만을 바라는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스스로 타인에게 공헌하기를 바라는 "타자중심성"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전환을 위해 필요한 것을 다음 세 가지라고 말한다. 1) 자기수용, 2) 타자신뢰, 3) 타자공헌.
먼저 "1) 자기수용"이란 자신의 조건과 능력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종의 "긍정적 포기"의 태도를 말한다. 자신의 능력을 무시하고, 무조건 "나는 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수용이 아니라 자기긍정, 즉 돈키호테와 같이 현실인식을 결여한 근거없는 낙관성이다. 자기수용이란 "변할 수 있는 것"과 "변할 수 없는 것"
을 구분하고, "변할 수 없는 없는 것"을 수용하고, "변할 수 있는 것"에 주목하는 것이다. 자신의 조건과 능력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자신의 발전을 도모하려는 용기, 그것이 자기수용이다.
다음으로 "2) 타자신뢰"란 타인을 믿을 때 조건을 달지 않는 호의를 말한다. 우리가 공동체 감각과 소속감을 갖기 위해서는 타인과 친교를 맺어야 하고, 친교를 맺기에 가장 진실한 것은 타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다. 인간관계에 회의를 가진 사람은 결코 관계맺음에 이를 수 없다. 타인이 나를 배신할까봐 그를 신뢰할 용기를 갖지 못한다면, 다시 기억해야 한다. 배신은 타자의 과제이지 나의 과제가 아니다. 물론 타자신뢰는 내가 관계맺고 싶은 사람에 대해서만 선택적으로 그러하다. 관계맺기 싫은 사람까지 신뢰할 필요는 없다.
마지막으로 "3) 타자공헌"은 타자를 위한 무조건적인 희생만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희생 안에서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을 말한다. 가장 일반적인 타자공헌은 "일"이다. 우리는 노동을 통해 타인에게 공헌하고, 공동체에 헌신하며, 그 안에서 스스로의 가치를 발견한다. 나의 공헌을 타인이 인정해 주는가는 관심밖의 일이다. 그것은 타인의 과제다.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주관적인 공헌감이면 충분하다. 아들러는 바로 이러한 "공헌감"을 행복이라고 정의한다.
인간관계를 오로지 경쟁적인 관계와 수직적인 관계로 보는 사람들은 모두 "우월감 컴플렉스"에 시달린다. 그리고 그런 관계에서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남보다 탁월해야 하며, 경쟁에 승리해야 하고, 타자를 지배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가치의 발견은 언제나 타자의 인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물론 타자의 인정을 통해서도 공헌감과 행복을 느낄 수는 있겠지만 거기에는 "자유"가 없다.
그래서 아들러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행복에 이르기 위해서는 "평범해질 용기"를 가지라고 말한다. 평범해질 용기란 무능해지라는 뜻이 아니라 일부러 자신의 우월성을 과시하지 않는 태도를 말한다. 인생을 특별해지기 위한 목적의 과정이라 생각한다면, 우리의 삶은 마치 그 목적에 오르는 등산이 된다. 정상에 올라야만 "진짜 인생"이 시작되고, 거기에 이르는 과정은 "가짜 인생"인 것이다. 그러한 생각이 우리의 인생을 불행하게 하는 원천이다.
"평범해질 용기"란 도리어 그러한 목적을 위한 "노동(키네시스적 인생)"의 아니라 바로 "지금과 여기"라는 현재를 살아가는 "놀이(에네르게이아적 인생)"의 삶을 말한다. 놀이는 목적 없는 행위, 즉 행위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삶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러한 삶을 "춤"에 비유한다. 춤을 추는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지 또 다른 목적을 갖지 않는다. 우리가 현재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면, 과거나 미래는 더 이상 나의 현재 삶을 구속하지 않는다.
우리가 과거의 삶이나 미래의 목표에 초점을 둘 때, 현재의 삶은 그 의미와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 사람들은 과거의 경험과 조건을 통해 현재의 불행을 결정론적으로 해석하며 체념을 정당화하고, 변화를 거부한다. 또한 미래의 목표는 현재의 삶을 미래를 위한 수단으로만 삼기 때문에 현재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다. 하지만 삶은 현재의 연속이다. 과거로 현재를 구속해서도, 미래로 현재를 억압해서도 안된다. 현재가 모여 미지의 목적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라"는 말은 바로 그러한 인생의 거짓말에서 벗어나라는 뜻이다.
살아가면서 유일하게 기억해야 할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곧 "타인에게 공헌한다"는 길잡이 별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내"가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 세상이란 다른 누군가가 바꿔주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나"의 힘으로 바꿀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아들러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미움받을 용기"의 메시지다. "미움받을 용기"란 인간관계로부터 달아나기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렇게 달아난 사람들에게 새로운 인간관계로 나아갈 용기를 주는 것이다. 부자유하고 불행한 인간관계에서 자유롭고 행복한 인간관계로의 전환, 그것은 내가 관계를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는가에 달려 있다.
아들러는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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