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사다리 2단계 : 긍정심리] 이산가족 10년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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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SLD 작성일21-12-14 11:11 조회2,14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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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가족 10년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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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사다리
정 영 진
우리 집 마당에는 연탄불 석쇠 위에 시커먼 숯덩이가 된 돼지고기가 연기를 내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집 주변에는 평소에 잘 먹지도 못하는 돼지고기를 굽는 냄새가 나면서 연기가 몽실 몽실 피어올랐고, 동네사람들이 집 근처를 오갈 때면 구수한 냄새에 입맛을 다셨다. 뜨거운 열기에 녹은 돼지비계의 지방이 연탄불에 떨어지면서 타는 냄새를 집 밖에서 맡아보면, 이상하게도 씁쓰름한 생소한 냄새가 동시에 느껴졌다. 사람들의 몸에 좋다는 인삼을 증기로 찔 때 나는 냄새였다. 잘 찌어진 인삼을 뜨거운 열기로 몇 일간 바짝 말리면 값비싼 홍삼이 되었다. 아버지는 인삼 찌는 냄새를 감추기 위해 돼지기름을 연탄불 위에 연신 올려놓으셨다.
해가 뉘엿뉘엿 담장으로 넘어가는 어느 날, 웬 낯선 사람들이 두 사람씩 짝을 지어 동네 여기저기를 기웃거렸고, 심지어 우리 집 안을 몰래 살피면서 오가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사람들이 하도 의심스러워 나는 조용히 집으로 들어가서 아버지께 “주위에 이상한 사람들이 기웃거리고 있다.”고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면서 급하게 대문을 나서는 데, 그 이상한 사람들은 아버지를 완력으로 밀치면서 다른 여러 명의 남자들이 함께 집안으로 들이 닥쳤다.
지금은 누구나 집에서 만들 수 있는 홍삼이 당시에는 전매청 법으로 정부에서만 만들 수 있도록 규제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이전에 여러 사업을 하시다가 벌이가 여의치 않자, 수익이 많이 나는 홍삼 밀조를 하신 것이었다. 전매청에 긴급 단속된 아버지는 당시 주택 몇 채에 해당하는 벌금을 물었다. 그 이후 우리 가족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살던 집에서 쫓겨났고, 10년 간 여기저기를 떠돌면서 살면서 경제 빙하기를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급한 대로 서울의 가장 변두리 지역에 허름한 집을 구해 가족들이 머물 수 있도록 했지만, 불안정한 수입으로 인해 형편은 그리 나아지지 않았다. 갈수록 더 어려워지는 살림살이로 인해 부모님은 더욱 자주 다투셨다. 그 여파로 어머니는 집을 떠나 있는 날들이 갈수록 많아졌다. 가정 상황이 불안정하게 되니 당시 사춘기를 맞이했던 나도 한 때는 덩달아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방종한 학창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하게도 나는 대학입시를 1년여 앞두고 아버지와 큰 다툼 끝에 파격적인 독립선언을 하였고, 스스로 학업과 미래를 책임지겠다는 생각으로 공군사관학교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4년 동안 사관생도 교육을 받았다. 사관생도 시절에는 경제적 여건이 어려워서 동기생들과 계획했던 여행도 참가를 하지 못했거니와, 여러 활동에 있어 스스로 절제와 통제를 하면서 보내게 되었다. 외출을 나와서는 아버님 혼자 계신 조그만 사무실 바닥에 누워 고생하시는 부모님과 동생이 안타까워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공군 소위로 임관하면서 전투기 조종사의 길을 가게 되었지만, 부모님은 여전히 경제적으로 어렵고 힘든 나날을 보내고 계셨다. 형을 떠나보낸 네 살 차이나는 남동생도 자신의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계속 방황하였다. 장교로 임관한 이후에는 부모님께 생활비를 조금씩 보태드렸지만, 여전히 가족들은 비용이 적게 드는 여관, 여인숙 등을 전전하는 생활은 변하지 않았다. 그 당시 나 혼자만 국가의 지원을 받으면서 잘 지내는 것이 가족들에게 너무 미안했지만, 초급 장교인 내가 가족들의 문제를 직접 해결해 줄 수 없어서 너무 안타까웠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께서 연락이 왔다. “네가 군인으로 월급을 받고 있으니 인천에 조그만 아파트를 네 명의로 대출을 받아서 사자.”고 하셨다. “그 집에 어머니도 모시고 ,가족들이 모여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렇게 내 생애 첫 번째 집을 부모님을 위해 마련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파산 이후 10여 년 동안 이산가족이 되다시피 살아 온 가족이 드디어 한 집에 모여 살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너무나 안타깝게도 아버지는 그 집에서 채 5년도 못사시고 위암으로 돌아가셨다. 지금 뒤돌아보면 우리 가족이 지내온 10년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당시 아버지에게는 수렁과도 같은 시기였을 것이고, 그로 인해 큰 병을 얻으셨고 아쉽게도 너무 일찍 돌아가셨다.
우리 가족의 고난의 시기는 내게는 보약과도 같았다. 나는 100세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가치를 그 때 몸과 마음으로 체득했다. 그 당시는 정말로 어렵고 힘들었던 시기였었지만, 지금 다시금 돌아보면 천금을 주어도 바꾸고 싶지 않은 소중한 시절로 기억된다.
1980년 공군사관학교 33기 사관생도 모집 포스터
1988년 봄 공군 대위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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